(2020년 11월 23일) 임영희 (남성)후배교수의 독후감

        아픈 기억과 다양한 삶이 만난 축제의 무대

                        -󰡔6.25칠십주년과 희수를 기념하며󰡕를 읽고




  경기여고 51회 동창생들이 󰡔6.25칠십주년과 희수를 기념하며󰡕를 펴내었다. 

책의 한쪽 부제가 <함께 가는 길 위에서 3>으로 되어 있으니, 

이번에 상재한 것이 이들의 3번째 책이 된다. 


  하나의 집단이 모여서 한권의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결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알아야 하고 또 공통의 문화 혹은 추억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6.25칠십주년과 희수를 기념하며󰡕는 그들만의 기억과 공통의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만들 수 있는 근거는 이들이 고교 동창생이라는 점이다. 

누구나 알 고 있는 바와 같이 고교 동창은 다른 어느 집단보다도 결속력이 강한 경우이다. 

이런 힘이 있기에 이 책을 묶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일곱 살 때 겪었던 전쟁 체험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는 아무도 없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나 그렇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은 언제나 원체험이라 남아있는 까닭이다. 

  

경기여고 51회 동창생들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이다. 

그러니 그때 겪은 생생한 일들이 다른 어느 세대보다도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아픈 것이었고, 기억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것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는 탈출의 고통이었고, 또 누구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그리고 우리들에 대한 측은지심의 정서로도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그로부터 얻은 상처들이 이후 자신의 삶을 계속 지배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여러 경험들이 모아져서 한 권의 묶음으로 나온 것이 이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우리의 현대사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이 지금 언표화됨으로서 다시 되살린 것이 이 책이 갖고 있는 가치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복원만으로도 우선 이 책은 충분한 사료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픈 정서적 트라우마가 과거의 그들에서 한정되지 않고,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이 외에도 그들만의 삶, 그들이 처한 일상의 삶들이 다양한 각도로 제시되어 있다.  

그들 속에 뿌리 내린 일상의 소소한 삶과 정서들이 여러 겹으로 우리 앞에 현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그들만의 정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정서 속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경우이다.  


  󰡔6.25칠십주년과 희수를 기념하며󰡕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일상이 두 겹으로 환기되고 있다. 

이 겹을 만들어내고 있는 층들은 하나의 단일성을 거부한다. 

비록 나이는 동일하지만 그들마다 경험한 기억들은 다양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 또한 여러 갈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다양성이 만들어낸 현란하면서도 다채로운 문집이다. 

그러한 까닭에 그것은 단지 과거의 그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것으로 우뚝 자리하게 된다. 

그 한편으로는 현재의 일상성이 그러한 과거와 대화하면서 

여러 주체들이 겪고 있는 삶의 겹들이 다양하게 뻗어나가기도 한다. 

   

이 책은 한 집단이 겪은 경험으로만 한정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와 현재의 다양성이 여러 체험의 언어로 부채살처럼 다양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담론들이 즐거운 축제의 장을 만들어냄으로서 

그들의 경험들이 우리들의 것으로 승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축제의 공간에 함께 참여하면서 그들의 기억과 공유하고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현재의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그 보편적 경험의 지대 속에서 과거의 그들과 현재의 그들, 

그리고 그들만의 체험과 기억이 아니라 우리들의 그것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이 갖고 있는 크나큰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11월 

문학평론가 송기한 교수